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태지와 아이들 2집 (문단 편집) == 여담 == * 소속사를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들이 직접 돈 내고 차린 "요요기획"으로 옮기면서 셀프프로듀스 방식을 채택했다. 사실 정규 1집만 타 기획사 소속으로써 발매하였고[* 멤버 본인들의 증언으론 소속사 측에서 잡아먹을 정도로 굴려먹었다고 한다. 단독콘서트 스케쥴도 잡혔는데, 연습시간조차 부족했을 정도로 굴려먹었다고 한다. 레어한 활동사진같은 걸 찾아보면 놀이공원에서 행사 뛴 것도 나온다. 그야말로 방송 끝나면 행사한번 돌고 그 뒤로 라디오 출연하고 등등. 첫 단독 콘서트는 영 맘에 들지 않는 결과물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대로는 다음 앨범도 제대로 못나오고 쓰여질 만큼 쓰여지고 버려지겠다 싶어서 소속사를 나오고 보조스탭도 로드매니저였던 최진열을 제외하고 죄다 갈아치웠다.], 1집 발매 후 나온 리믹스 앨범이자 라이브 콘서트 앨범인 "테크노믹스 & 라이브"부터는 모두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 자체의 자가 프로듀스로 바뀌었다. 물론 음반 배급사는 데뷔 때부터 해체 때까지 배급을 맡았던 '''반도음반'''. * [[2010년]] 음악웹진 100BEAT가 선정한 [[100BEAT 선정 베스트 앨범 100|1990년대 100대 명반]]에서 28위에 랭크되었다. * [[2013년]] [[응답하라 1994]]가 방영되면서 [[하여가(서태지와 아이들)|하여가]]는 오프닝 곡으로 나왔으며, 너에게가 OST 리메이크 곡으로 실렸고 [[성시경]]이 노래를 불렀다.[*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 중에서 최초로 리메이크된 곡이기도 하다.] 서태지가 이례적으로 자필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 이 당시에 나름 일본 활동을 했다. 일본에서 열린 음악 행사에 출연한 자료가 유튜브에 발견된다. [youtube(BrtBO1CwE28)] * 이후 일본의 소니 안티노스 레이블과 정식 계약을 맺고, 1집과 2집 주요 곡을 합친 일본반과 3집이 발매된다. 그래서 이 시기에 서태지를 접한 일본인들이 있었다. 이 [[http://themainstream.jugem.jp/?eid=3522|블로그 글]]은 2018년 시점에서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을 듣고 느꼈던 바를 회상하는 글인데, '''대담한 악곡의 접근법이 지금 들어도 신선하다(あまりにも大胆に攻めた楽曲アプローチは今聴いてもかなり新鮮です。)''', '''현재의 케이팝의 문을 열여 젖혔다(現在につながるK-POPの扉をこじ開けたんじゃないかという気もします。)'''라는 감상을 남긴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 블로거는 '비영어권 음반의 중요한 록 앨범 101장'이란 주제로 시리즈 글을 올렸는데, 그중 하나가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이었다. >そして今回のラストを飾るのは韓国です。アーティストは、ソテジ&ザ・ボーイズ、ハングル読みだとソテジ・ワ・アイドゥルです。 >그리고 이번에 (연재)의 라스트를 장식하는 것은 한국입니다. 아티스트는 서태지 & 보이즈, 한글로 읽으면 서태지와 아이들입니다. >韓国でのロック史は1960年代から始まっていたとは聞きます。さらに言えば韓国のポップ・ミュージックのオールタイムでも、80年代のバンドが上位に入ったりもします。ただ、僕もそれらの情報を頼りに聞いてはみたものの、なんか日本におけるニュー・ミュージックみたいというか、その域にまでもいかない感じで、まだ80年代までなら「ロックはまだ難しいかな」と思える瞬間も決して少なくなかったです。 > >한국의 록 역사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덧붙이자면 한국 대중음악 전성기에서도 80년대 밴드가 상위권에 들었다고 합니다. 다만 저런 정보를 접한 제가 느끼기에도, 뭔가 일본의 뉴 뮤직 같은 경지까지는 아니라는 느낌이라, 80년대라면, '록은 아직 어려운 것이었나'라고 생각한 순간이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 >そんな韓国がポップ・ミュージックの立場を一気に逆転させる契機が90sの前半に訪れます。それがソテジ・ワ・アイドゥルでした。彼らは90sの初頭に、当時アメリカでかなり人気に火がつきつつあったR&Bやヒップホップのサウンドを韓国のポップ・ソングに大胆に取り入れ、結果的にそれが韓国のポップ・ミュージックそのものを大きく変えてしまうことになります。 >그런 한국이 팝 음악의 입장을 단숨에 역전시킨 계기가 90년대 전반에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서태지와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90년대 초에 당시 미국에서 굉장히 인기에 불이 붙었던 R&B나 힙합의 사운드를 한국의 대중음악에 대담히 도입해 결과적으로 그것이 한국 대중음악 그 자체를 크게 변화시키고 말았습니다. > >とりわけ、93年に発表されたこのセカンド・アルバムからのシングル「ハヨガ」の存在は極めて大きなものでした。 >그중에서도 93년에 발표된 2집 앨범의 싱글 '하여가'의 존재는 대단히 큰 것이었습니다. > >これ、この当時、友達から聞かされた時、衝撃受けましたね。 だって、この当時、日本でレッチリとかフェイス・ノー・モアって本当に限られた人しか聞いてなかった時代に、韓国では、ハードロックをサンプリングしたミクスチャー・ヒップホップが200万枚を超えるヒットになってたんだから。日本でのドラゴン・アッシュのブームの5年も前にですよ。これは驚きましたね。オケヒットの連打だけが、あの当時の日本のビーイング系みたいで、メロディもどことこなく韓国っぽくはあったんだけど、あまりにも大胆に攻めた楽曲アプローチは今聴いてもかなり新鮮です。 > >당시 친구로부터 이 앨범을 접했을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라든가 [[페이스 노 모어]] 등은 정말로 한정된 사람들만 들었던 시절인데, 한국에서는 하드록을 샘플링한 믹스츄어 힙합이 200만 장 넘게 히트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드래곤애쉬]] 붐이 일어나기 5년 전이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Orchestra hit(오케스트라 효과를 내는 사운드 이펙트)의 연타만이 당시 일본의 '빙 계열' 같으며, 멜로디도 어디에도 없는 한국가요스러움이 있었지만 이렇게도 대담하게 치고 나오는 악곡의 접근은 지금 들어도 신선합니다. > >実際、韓国ではこれ以降、アイドルがアメリカの最新型のR&Bやヒップホップを意識したポップスを歌うことがお家芸となりました。そう考えると、ソテジのこれこそが、現在につながるK-POPの扉をこじ開けたんじゃないかという気もします。 > >실제. 한국에서는 이후 아이돌이 미국의 최신형 R&B나 힙합을 의식한 대중음악을 부르는 일이 자신의 장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서태지야말로 현재로 이어지는 케이팝의 문을 열어젖히지 않았나 싶습니다. >それもそのはず、メンバーの一人だったヤン・ヒョンソクは96年の解散以降にプロデューサーに転向し、YGエンターテイメントを立ち上げます。そこでBIG BANGや2NE1などを成功させ、K-POPブームを牽引したわけですからね。既にその種子はこの時点で蒔かれていたのです。 >그도 그럴 것이, 멤버였던 [[양현석]]은 [[1996년|96년]] 해체 이후 프로듀서로 전향해 [[YG엔터테인먼트]]를 세웠습니다. 그곳에서 [[BIGBANG|빅뱅]]과 [[2NE1]] 등을 성공시켜 케이팝 붐을 견인했습니다. 이미 그 씨앗은 이 시점에서 뿌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분류:1993년 음반]][[분류:한국의 음반]][[분류:서태지와 아이들의 음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